지글러라는 이름의 사나이 (환상동화집)
옛날 브라우어 거리에 지글러라는 이름의 젊은이가 살고 있었다.
(중략)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자신이 어떤 본보기가 될때는 개성적인 인격체로 처신했고, 모든 사람들처럼 자기 자신, 즉 자신의 운명 속에서 세계의 중심점을 찾았다. 의혹이란 그와 거리가 먼 것이었으며, 어떤 사실들이 그의 세계관에 어긋날 때엔 비난 ㅎ면서 눈을 감아버렸다.
(중략)
그는 항상 그해의 유행을 따르면서도 자신의 스타일대로 옷을 입으려는 노력 때문에 겉으로는 멋있어 보였다. 그의 스타일을 지나치게 뛰어넘는, 계절마다 또는 달마다 바뀌는 유행은 당연히 어리석은 흉내라고 경멸하였다. 그는 인격을 중시했고, 안전한 장소에서 자기처럼 인격을 갖춘 사람들과 상관이나 정부를 비방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지 않았다.
지글러에 대해 너무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사실 지글러는 매력있는 젊은이였다. 우리는 그에 관에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왜냐하면 그가 많은 계획과 당연시했던 희망과는 반대로 일찍 이상한 최후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 도시로 온 직후, 한번은 유쾌한 일요일을 보내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직 사람들과 제대로 교제를 하지 못했고, 아직 어떤 모임에 들어갈까도 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불행이었던 것 같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은 좋은일이 아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꼽아 두었던 도시의 명소를 다녀보기로 했다. 충분히 검토한 끝에 역사 박물관과 동물원을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박물관은 일요일 오전에는 공짜였고, 동물원은 오후에 할인 가격으로 관람할 수 있었다.
일요일에 지글러는 가장 아끼는 새 외출복을입고 역사박물관으로 갔다. 가느다랗고 우아한 산보용 지팡이를 휴대했는데, 이 래커 칠이 잘된 네모난 지팡이는 그에게 안정감과 동시에 화려함을 주었다. 그러나 몹시 불쾌하게도 전시실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문지기에게 압수당하고 말았다.
천장이 높은 전시실에서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이 경건한 관람자는 마음속깊이 전능한 학문을 칭송했다. 진열창 옆에 붙어 있는 자상한 설명문에서 알 수 있듯이, 여기서도 학문은 공로가 인정될 만한 신뢰성을 보여주었다. 녹슨 열쇠, 녹청색의 깨진 목걸이와 같은 골동품이 설명문에 의하면 놀라운 흥미를 불러 일으켰다. 학문이 어떤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는가, 알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를 보는 것은 놀라웠다. 그렇다, 틀림없이 학문은 곧 암을 정복할 것이다. 아마 죽음까지도.
두번째 전시실에서 그는 유리 찬장을 발견했는데, 그 유리가 아주 잘 비춰주어서, 잠시 동안 자신의 옷, 머리 모양, 옷깃, 바지의 주름, 그리고 넥타이의 매무새를 조심스럽고 흐뭇한 마음으로 매만질 수 있었다. 즐거운 기분으로 계속 나아가다가 옛 판화가의 작품 몇 점에 주의 를 기울였다. 아주 순박하긴 하지만 유용한 것들이군, 하고 그는 호의적으로 생각했다. 또, 코끼리 다리가 달린 옛 탁상시계와 시각을 알릴때 미뉴에트 춤을 추는 작은 인형을 살펴 보았다. 그러자 이 일이 조금 지루해지기 시작하였다. 그는 하품을 하면서 자주 회중시계를 꺼내 보았다. 이 묵직한 금시계는 아버지의 유품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점심식사를 하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서 지신의 호기심을 다시 사로잡을 만한 것이 없을 까 하고 다른 전시실로 들어갓다. 거기엔 중세의 미신에 관한 물건들, 예컨데 마술 책자, 부적, 마녀의 옷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한구석에는 대장간의 화덕, 절구, 볼록한 유리그릇, 말린 돼지방광, 풀무 등을 갖춘 연금술 작업장을 완전히 재현해 놓았다. 이 구석은 줄로 막혀 있었고, <물건에 손대지 마시오>라는 팻말도 걸려 있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팻말을 잘 읽지 않는 법이다. 게다가 실내에는 완전히 지글러 혼자뿐이었다.
그는 무심코 줄 위로 팔을 뻗어 우스꽝스러운 물건 몇 개를 만져보았다. 이러한 중세와 그 기이한 미신에 대해서는 이미 듣고 읽은 게 많았다.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떻게 그 당시 사람들은 이렇듯 유치한 물건에 매달릴 수 있었는지, 마녀의 온갖 속임수와 도구들을 금하지 않았는지. 그것에 비하면 연금술엔 변명의 여지가 충분할 것 같다. 바로 거기에서 유용한 화학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기막힌 일이다. 이 연금술사의 도가니와 어리석은 마술 도구가 없었다면, 오늘날 아스피린도 가스 폭탄도 존재하지 못했으리라 생각하니!
그는 생각없이 조그맣고 까만 구슬 하나를 손에 쥐었다. 무게도 나가지 않고 바싹 마른 것이 무슨 알약 같았다. 그것을 손가락사이에서 굴리다가 막 제자리에 놓으려고 하는데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몸을 돌렸다. 관람객 한 사람이 들어왔다 구슬을 손에 들고 있는 게 지글러에겐 당혹스러웠다. 물론 금지 팻말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는 손을 오그려 주머니에 찔러넣고 밖으로 나갔다.
길 위에서야 비로소 다시 알약 생각이 났다. 그는 그것을 꺼내어 던져버릴까 생각했다. 그러나 우선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아보았다. 그 물건에서는 연한 송진 냄새가 났다. 냄새에 흥미를 느껴 그는 다시 구슬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이제 그는 식당으로 가서 식사를 주문했다. 신문 몇 종을 살펴보다가 자신의 넥타이를 매만졌다. 그는 어떤 옷차림을 했느냐에 따라 어떤 손님은 공경하는 눈으로, 어떤 손님은 깔보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식사가 좀 지체되자 지글러는 얼결에 훔쳐온 연금술사의 약을 꺼내어 냄새를 맡았다. 그 다음엔 집게 손가락으로 긁어보았다. 결국 어린애같이 순진한 충동에 따라 알약을 입에 갖다 대었다. 그것은 입안에서 재빨리 녹아버렸다. 맛이 그리 나쁘지 않아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셔 입가심을 했다 곧 이어 식사가 나왔다.
2시 정각에 이 젊은이는 전차에서 뛰어내려 동물원 앞마당에 들어섰고, 일요일 표를 구입했다.
다정하게 웃으면서 그는 원숭이 집으로 들어가 커다란 우리 앞에 섰다. 우람한 원숭이 하나가 눈을 깜박이며 기분 좋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깊이 가라앉은 목소리고 말하는 것이었다.
'잘 지내고 있나, 친구?'
이 이상한 일에 현기증이 날 정도로 놀라서 그는 재빨리 등을 돌렸다. 걸어나오는 동안 뒤에서 원숭이가 욕하는 소리가 들여왔다. ' 저 녀석 여전히 건방지구먼! 발바닥이 평평한 바보!'
급히 지글러는 바다표범 쪽으로 건너갔다. 그것들은 희희낙락 춤을 추면서 외쳤다. ' 설탕 좀 주게나, 친구! ' 그가 설탕을 갖고 있지 않자, 바다표범들은 화가 나서 그의 흉내를 내며 거지라고 놀려대었다. 이를 드러내고 그를 향해 으르렁대기까지 했다. 그는 참을 수가 없었다. 놀라고 당황하여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보다 상냥한 태도를 기대하면서 사슴과 노루에게로 발길을 돌렸다.
크고 잘 생긴 사슴 한 마리가 울타리 가까이 서서 이 방문객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글러는 마음속 깊이 놀랐다. 그 마술의 알약을 삼킨 뒤부터 동물들의 말을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그 큰사슴은 두 개의 커다란 갈색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녀석의 고요한 눈빛은 고귀함, 복종, 슬픔을 이야기했고, 구경꾼들에 대해 오만하고 진지한 경멸, 즉 무서운 경멸감을 나타냈다. 이 조옹하지만 위엄에 찬 시선에서 지글러는, 모자와 지팡이와 시계를 착용하고 나들이옷을 입은 자신이 실은 쓰레기 같은 존재, 가소롭고 메스꺼운 가축에 지나지 않다는 사실을 읽어내었다.
큰 사슴에게서 도망친 후 지글러는 산양, 영양, 라마, 멧돼지, 곰에게 갔다. 이들 모두에게 멸시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여, 그것들이 인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되었다. 인간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끔찍하였다. 요컨대 그것들은, 이 추하고 내새 나고 품위 없는 두 발 달린 인간이 말쑥한 옷을 차려입고 멋대로 돌아다니는 꼴을 의아하게 여겼다.
지글러는 퓨마가 자기 새끼와 이야기하는 말을 들었다. 그 대화는 사람들에게서는 거의 듣기 어려운, 품위와 실질적인 지혜로 가득 찬 것이었다. 아름다운 표범이 일요일의 관람객 중 무례한 사람에 대해 기품 있는 표현으로 짧지만 의젓하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갈색 사자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우리도 없고 인간도 없는 야생의 세계가 얼마나 넓고 경이로운가를 알았다. 황조롱이가 죽은 나뭇가지 위에 우울하지만 당당한 모습으로 앉아 있었고, 어치들이 새장에 갇힌 신세를 단정하게, 어깨를 으쓱하는 유머를 잃지 않고 이겨내고 있었다.
멍한 상태로, 모든 사고의 습관에서 벗어나 지글러는 다시 의혹의 시선을 인간들에게 던졌다. 그의 고통과 불안을 이해해 줄 눈동자를 찾았다. 무언가 위안이 될 만한 것, 이해해 줄 만한 것, 선의로운 것을 듣기 위해 그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많은 관람객들의 태도를 유심이 관찰했다. 그들의 어느 구석에서든 품위, 천성, 고귀함, 조용한 우월감을 찾아보기 위하여.
그러나 실망하고 말았다. 그는 목소리와 대화를 들었고, 행동거지와 눈빛을 보았다. 이제 모든 것을 동물의 눈을 통해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가 발견한 것은, 이 말쑥하게 차려입은 동물들이 실은 타락하고 위장된 기만의 무리에 다름없다는 사실이었다.
지글러는 스스로에 대한 수치심을 억제하지 못하고, 절망적으로 이리저리 헤매며 다녔다. 네모난 지팡이는 이미 덤불 속에 던져버렸다. 이어서 장갑까지. 그러나 이제 모자를 벗어 던지고, 장화를 벗고, 넥타이를 풀어 헤친 채 울부짖으며 큰사슴 우리의 창살에 몸을 비벼대었다. 결국 그는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붙잡혀 한 정신병원으로 이송되었다.
(1908) 헤르만 헤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