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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은책, 읽고 싶은책

나를 사로잡은 그녀, 그녀들

함정임 지음.

함정임의 이 책은 돌틈 깊은 곳에서 솟아나 졸졸 흐르는 물소리 같고 해질녘, 텅 빈 광장 긴나무 그림자 옆으로 낭창낭창 걸어가는 실루엣 같은 글이다. 그러나 조금 더 들여다보면 고통과 누추, 유혹과 열정, 생에 대한 원초적 공포로 가득차 있다.
그녀는 비행기를 타고 기차를 타고 줄기차게 떠난다. 일년에 한번은 꼭 짐을 꾸려 떠났다니까 돌아본 곳도 만만치 않다. 고대 도시 폼페이로 뉴욕으로 영국으로, 그리고 파리, 부다페스트, 함정임을 거기로 이끈 것은 그녀가 말하는 ' 그녀들'이다.
"벌거벗은 그녀, 노니는 그녀, 목욕하는 그녀, 달리는 그녀, 웅크린 그녀, 복수하는 그녀들.함정임은 그 그림들 앞에서 곤혹스러워하고 황홀해하며 집요하게 묻는다. 당신은 누구인지, 그런 당신이 누구인지 묻고 있는 나는 대체 누구인지. 그러자 그녀들이 대답한다. 에드가의 ' 압생트 ' 에서는 서른 아홉에 남편을 잃고 홀로 자식들을 부양해야 했던 자신의 어머니를, 그리고 반 고흐의 '슬픔'에서는 서른 세살 적 어느 봄날 잃어버린 사랑하는 사람을, 제 마음 하나 보자고 저렇게 많은 길을 떠나나, 싶었지만 나는 글에서 눈을 뗄수가 없었다.
온 세상을 다 헤메고 온 生을 다 헤집어 본다고 해도 나라는 것의 자취가 없는 것인지, 마음 깊은 불자는 이런 글을 보고 '본디 없는것'이라고 냉정히 잘라 버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함정임과 함께 그녀들의 생을 추적하는, 그녀의 여정을 따라 다녔다.
"사람이거나 사랑이거나 또는 예술이거나 어디에 깊이 빠지는 일은 그리하여 송두리째 나를 버리고 그 대상에 몰입하는 일은, 그러므로 급기야는 몰아지경에서 내가 그 대상이 되어버리는 끔찍한 일은 다시 므릅쓰고 싶지 않았다" 고 그녀는 쓰지만 베네치아에서 만난 프리다 칼로를 두고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야 만다.
"나는 프리다에게 손을 들어줬다. 내가 기역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그녀만큼은 됐다. 그녀만큼 저주받았고 그녀만큼 축복받았고 .... 그녀만큼 광적이었다. 무엇에? 삶에. 예술에, 사랑에, 그 자신에! 무엇보다 그 자신이라는 예술에!"
"중요한 것은 그림이 아니라 그 그림을 바라보는 눈"이라는 대목에서 나는 함정임을 '사로잡는 그녀들' 을 , 시대는 달랐지만 여성으로서의 축복과 저주를 공유한 '그녀들을' 응시하는 그녀의 투명한 눈에 사로잡히는 듯했다. 그리고 타인의 눈에서 고통을 알아차리는 자의 고통을 나 또한 응시하며 동베를린 운터 덴 린덴가 노이에 바헤에 있는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를 바라본다.
"케테 콜비츠의 '피에타' 앞에 서면 누구라도 절로 고개를 숙이고 만다. 나, 나는 무슨 잘못을 얼마나 하였나, 가슴에 손을 얹고 양심에 떳떳할 수 있는가. 그리하여 나는 잘 살고 있는가!"
이 책 하나로 나는 벌써 온 세상을 다 헤매버린 것만 같다.

중앙일보 BOOK REVIEW 공지영의 글밭산책 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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